세종보 천막농성 1년 투쟁문화제 참가자들이 거리행진을 벌이고 있다 ⓒ 김병기 ▲ 세종보 천막농성 1년 투쟁문화제에서 극단 '우금치'가 공연을 하고 있다 ⓒ 김병기 이날 투쟁문화제 참가자들은 행사를 마친 뒤 5km 정도 떨어진 세종보 앞까지 만장과 깃발을 들고.
전쟁의 승기를 기화로 조선 조정을 더욱 압박했다.
동학군은 서울 진격을 선언했다.
하지만, 11월 8일부터 11일까지 나흘간 공주우금치전투에서 주력군은 분패하고 말았다.
전봉준 등 지도부는 잔여 병력을 모아 다시 최후의 일격을 노렸다.
그는 “불의한 권력이 철수한 찰나의 광주에서 꾸었던 대동세상의 꿈이 2024년 ‘빛의 혁명’으로 이어졌다”며 “1894년우금치고개를 넘지 못한 동학혁명의 꿈이 2024년 마침내 남태령을 넘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혼돈 속에서 번영의 새 길을 내야.
연등축제 사전공연으로는 해병2사단 군악대의 연주와 초청가수 공연, 전통시장 활성화를 주제로 한 마당극패우금치의 별을 먹는 장돌뱅이 공연을 통해 전통 5일장의 추억을 소환하고 인간미 넘치는 전통시장의 풍경을 재현할 예정이다.
위대한 주권자들을 80년의 광주영령들이 지켜냈고, 세계로 퍼져갈 K-민주주의가 드디어 찬란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1894년우금치고개를 넘지 못했던 동학혁명군의 꿈이 2024년 마침내 남태령을 넘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남긴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
사건이 끊이지 않았으나, 핵심은 '동학농민혁명'이었다.
정월에 발생한 '고부 민란'을 시작으로 동짓달의 '우금치전투'에 이르기까지 갑오년은 온통 이로 인해 들썩였다.
하나의 사건이지만, 성격은 몇 번이나 바뀌었다.
세계사적으로 보면 과학 기술에 투자한 나라는 흥했고 도외시한 체제는 망했다"며 "우리 근세사를 보더라도, 동학농민군이우금치에서 개틀링 기관총에 무장한 일본군한테 전멸당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일본군이) 2천여 명 정도였고, 동학군이 2만 명이.
전봉준은 1894년 11월 공주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게 패배한 뒤 재기를 모색하다가 옛 부하 김경천의 배신으로 동족의 손을 거쳐 일본군에게 넘겨졌다.
그럼에도 그는 고을 벼슬아치들이 일본군을 접대하는 모습을 보자, 그들을 ‘너희들’이라고 부를.
디렉터) △계명국(자라섬재즈페스티벌 총감독) △김형준(그루잠프로덕션 대표) △정미현(한국회화회 회장) △성장순(별별마당우금치극장장) △오길상(트리거비드 기획팀장) △이세준(경희대학교 미술대학 강사) △정선구(전 A&A 대표) △박영준(우진문화공간 감독.
) 이 정의로움을 위해 목숨을 던진 죽음의 저항 굿판이 있었다.
바로 동학농민군의 최후결전지는우금치전투였다.
학창시절 풍물 선생님으로부터우금치전투에서 제일 선두에 섰던 이들이 바로 풍물굿패였다는 말을 들었다.
우금치고갯마루에 최신식 게틀링.